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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 for Democracy)
- 아시아 지역의 인권 신장과 평화를 위하여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친절하고 사려 깊은 소개를 해 준 사회자 Chirdchu Raktabutr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오늘 강연을 하도록 초대해 주신 Nurak Marpraneet 태국 헌법재판소장님을 비롯한 태국 헌법재판소 관계자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마련하느라 애쓰신 모든 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태국에서 이 같은 강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으며, 이 자리를 통해 태국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주역들과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for Democracy)입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오늘날 입헌주의(modern constitutionalism)의 요체에 해당합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법의 지배, 법의 지배가 없는 민주주의는 맹목적이거나 공허할 수 있습니다(blind or void). 따라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함께 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법의 지배의 의미는, 행정에 대한 법적 통제에 그치지 않고, 입법을 포함한 국가권력 일반에 대한 헌법적 통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헌법재판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강연에서 저는 권력에 대한 헌법적 통제라는 맥락에서 법의 지배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법을 통해 민주적 제도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정치적 권리들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과 민주적 질서를 훼손하려는 반민주적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일이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평등한 자유인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연유하는 의사결정방식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시민의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는 데 있어서 불평등이 생긴다면, 다시 말해 누구는 더 자유롭고 누구는 덜 자유롭다면 그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시민들에게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오늘 저는 “민주주의를 위한 법의 지배”에 기여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노력을 소개하고, 나아가 법의 지배의 국제적 실천을 위하여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실천 방안, 특히 반인도적 행위로 인하여 인권을 침해받은 피해자 구제를 위한 아시아 지역 차원의 인권보장기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한 국가 내의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인권보호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 헌법재판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인간의 자유 및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헌법에 의하여, 비로소 자유민주주의는 확고한 법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으며, 사회적 약자도 존중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었습니다.
법치국가는 인권이 침해된 개인이 사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상의 인권은 문언 상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그 현실에서 규범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작용이 오히려 헌법상 규정된 기본권을 침해할 때에 그로부터 국민의 기본권과 헌법적 가치를 보호하는 법제도가 필요합니다.
한국과 태국의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헌법재판소들은 국가가 기본적 인권을 침해받은 국민을 보호하고 권리구제를 도모하여야 한다는 점을 여러 결정을 통하여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를 크게 신장하는 1987. 10. 29. 제9차 전부 개정 헌법에 의하여 1988. 9. 창립되었습니다. 과거 헌법재판에 소극적이었던 대법원과 헌법위원회가 제 기능을 못했다는 반성적 고려 하에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졌습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나치 권력이 기본권을 침해한 것을 통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1951년 설립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연혁적으로는 1960년 개정 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법을 제정·시행한 적이 있으나, 실제로는 헌법재판소가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가 1년 여 후에 헌법재판소를 폐지하는 헌법개정으로 헌법재판소가 창설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재판의 전제가 된 법률에 대한 법원의 위헌법률제청에 따른 위헌법률심판, 권한쟁의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가 제기하는 헌법소원심판을 관할합니다.
헌법재판소가 내린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 권한쟁의심판의 결정, 헌법소원의 인용결정은 모든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를 기속합니다. 위헌결정의 기속력으로 인하여 법원은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조항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 법원이 위헌 결정된 법률을 재판에 적용한다면, 예외적으로 그러한 재판은 헌법소원을 통해 취소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원칙적으로 그 결정이 있는 날로부터 효력을 상실하나, 형벌에 관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합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심판에서 기본권 침해의 원인이 된 공권력의 행사를 취소하거나 공권력의 불행사가 위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탄핵심판청구가 이유 있는 때에 헌법재판소는 해당 공직자의 파면결정을 하고, 그로 인하여 해당 공직자의 민사상 또는 형사상 책임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정당해산을 명하는 결정이 선고되면, 그 정당은 해산되고 소속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합니다.
1988년 헌법재판소 창설 이래 지난 28년 동안, 한국 헌법재판소는 과거 군사독재 정부의 유산인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에 대한 과감한 위헌선언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다수의 결정들을 통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1970년대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형사처벌을 하던 근거였던 대통령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결정한 것(2013)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 불합리하게 여성을 차별하는 법률 등에 대한 심사를 해 왔습니다.
특히 한국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각별한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 재외 거주 국민의 국민투표권을 주지 않은 선거법 위헌 결정(2007),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 위헌 결정(1995, 2001, 2007, 2014), 비례대표 선거를 지역대표 선거와 분리하도록 한 결정(2001) 등을 통하여, 국민의 의사가 정당하게 대의기관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국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 왔습니다.
또한 영화와 음반,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검열제도 위헌(1996, 1997, 2001, 2005, 2008), 인터넷에 글을 쓰기 위해서 실명확인을 해야 하는 규제 위헌(2012), 외교 공관 주변의 집회시위 전부 금지 위헌(2003), 해가 진 이후의 집회시위 금지 일부위헌(2009, 2014) 등 표현의 자유를 획기적으로 보장한 결정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민주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통치질서의 운용과 해석에 관하여도 한국 헌법재판소는 의미있는 결정들을 하였습니다.
국회에서 야당의원에게 회의 소집을 제대로 통지하지 않고 법률안을 날치기로 통과한 것은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하였다는 결정(1997),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중대한’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어야 한다고 판시하고 대통령 탄핵을 기각한 결정(2004) 등이 있습니다.
또한 2014년에는 헌법질서를 부정하며 폭력적 수단으로 국가기간시설 파괴를 선동하는 등 그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을 해산결정한 바 있습니다.
민주적 기본질서란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하며,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되 소수자를 배려하며,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구성·운영되는 정치적 질서입니다.
다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이 지니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정당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적 지향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고, 정당해산을 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기본질서 위반의 정도에 비추어 비례원칙을 준수하여야 하며, 구체적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명확하게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한국 사회가 보다 평등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가족관계에서 남계 혈통을 중요시하는 호주제(2005),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하는 민법 조항(2005)이나 부계혈통주의를 정한 국적법(2000)에 대한 위헌결정 등을 통하여 가족 제도를 민주적으로 개선하고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였습니다.
또한 공무원 선발시험의 나이 제한(2008)이나 불평등한 가산점의 부여(1999, 2006),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차별하는 것(2007), 검사의 수사기록 열람거부(1997), 사실상 칸막이 없는 유치장 화장실 운영(2001)이 위헌이라는 결정 등을 선고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체계적이고 일관된 헌법 해석을 통하여 공권력 행사를 감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하는 헌법재판이 활성화되면서, 헌법에 담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공고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남용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기본권 주체로서 국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 헌법재판소는 지난 2005년 이후 한국의 유수의 언론기관의 여론조사에서, 정부 기관 중 국민적 신뢰도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줄곧 1위를 유지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2.
태국도 1997년 헌법 개정을 통해 1998년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2006년과 2007년 헌법 개정을 거치면서 현재 헌법재판소는 2007년에 다시 구성되어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국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는 원래 1997년 헌법을 기초로 1998년에 설립되었으나, 2006년 쿠데타를 거치면서 임시헌법을 통해 종전 헌법재판소가 해산되고 다른 헌법심판소(constitutional tribunal)가 설치되었다. 기존 사건들은 모두 새로운 헌법심판소로 넘겨졌고, 이 헌법심판소는 대법원장이 소장이 되었다. 이어서 2007년 헌법에 따라 다시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태국의 헌법재판소는 세계 어느 나라의 헌법재판소보다도 포괄적이고 빈틈없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정당해산심판권한이나 권한쟁의심판권한 등을 보유하고 있지만, 특히 규범통제권한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도를 구비하고 있는 점이 돋보입니다.
태국은 법률이 공포되기 전에 법률안의 위헌여부를 심사하는 사전적 규범통제제도를 포함하여 추상적 규범통제제도와 구체적 규범통제제도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조직법 법률안(Organic Bills) 조직법 법률안은 반드시 사전적 규범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조직법으로는 9종이 있는데, 선거법/ 선거위원회법/ 정당법/ 국민투표법/ 헌법재판소법/ 고위직정치인에 대한 형사절차법/ 옴부즈맨법/ 부패방지법/ 국가회계법이 이에 해당한다(태국 헌법 제138조).
이나 일반법 법률안 상·하원 의장(하원의장은 국회의장 겸임, 상원의장은 국회부의장 겸임), 수상이 법률안의 위헌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의회에서 청구하는 경우에는 상·하원 전체 재적의원 1/10이상의 찬성 필요하다.
에 대하여 법 시행 이전에 제기되는 위헌 논란을 사전에 해결하고자 하는 사전적 규범통제제도로부터 헌법질서를 보다 완전하게 수호하고자 하는 태국 국민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사전적 규범통제제도나 추상적 규범통제제도가 없는 상태이어서, 이 제도의 도입 문제가 논의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국은 2007년 헌법 개정으로 헌법소원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한국은 1988년 재판소 설립 당시부터 헌법소원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헌법소원제도에 힘입어 헌법재판이 활성화되고 국민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국의 헌법소원제도 도입은 오늘날 헌법소원제도가 확산되어 국민이 자신의 기본권 침해를 다툴 수 있는 직접적인 절차를 보장하고자 하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 태국의 헌법재판 역시 동참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제도적 토대는 태국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앞으로 더욱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국이 아시아 및 국제 사회에서 더 큰 활약을 함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국민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해 온 태국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점점 커질 것입니다.
3.
그런데 한 국가 내 헌법재판기관의 판단은 효력범위의 한계로 제한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 헌법재판의 도전과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반인도적 인권침해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라는 경계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도 태국과 함께 한국 헌법재판소의 주도로 2010. 7. 자카르타 선언을 통하여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이하, 아재연합)을 창설하였고, 2012. 5. 대한민국 서울에서 아재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처음 7개국으로 출발하였던 아재연합은 지금 16개국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재연합을 통하여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도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태국 헌법재판소도 아재연합 창립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각국 헌법재판기관의 연합체는 그 자체로는 법률적 강제성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지역적 인권보장기구입니다.
다자간 국제조약에 근거한 지역 인권보장기구는 인권 보장의 내용에 관해 지역 내 국가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합의를 하고, 위반행위에 대한 조사·판단·집행 등에 관해서도 강제력 있는 합의에 따라 운영됩니다. 지역 국가들의 상호 감시 및 압박 등을 통해 지역 인권보장기구의 결정의 이행이 확보될 수 있으므로, 인권 보장의 실효성도 매우 높습니다.
지금 유럽 및 미주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유럽인권재판소, 미주인권재판소, 아프리카 인권재판소 등 지역적 인권보장기구가 운용되고 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는 각국의 헌법재판기관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지역 전체의 인권 수준을 향상시키고 인권, 민주주의, 법의 지배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인구의 60%가 살고 있으며, 한국과 태국이 함께 속해 있는 아시아에만 유일하게 지역 차원의 인권재판소가 없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녹록치 않은 여러 인권상황과 아직까지도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미진한 아시아의 비극적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4.
아시아는 위대한 대륙입니다. 인류의 최초 4대 문명 중 메소포타미아, 황하, 인더스 문명이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하는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기독교·이슬람교·불교·유교·힌두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사상들 역시 아시아에서 발원하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국제인권보장체제의 기초가 된 세계인권선언을 1948년 국제연합에서 마련할 때에도 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참여하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인권 목록에 확실히 포함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지난 세기에 아시아 각국은 전쟁의 참화와 식민지배로 인한 고통, 독재로부터의 위협을 겪으면서 심각한 인권침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근저에는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강대국들의 이중잣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의 나라들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과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동시에 성취해 가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이미 세계의 가장 활발한 산업생산 지역이자, 곧 유럽연합을 능가하는 최대 소비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이 아시아에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여러 분의 나라 태국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태국은 넓은 영토와 풍요로운 자원 위에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20세기에 제국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태국은 아세안의 리더 국가이자 세계 1위의 관광 대국으로서, 세계중심지인 방콕을 수도로 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적인 국가 중 하나이며, 누구나 향후 장기적인 발전을 기대하는 국가입니다.
Thailand의 “thai”가 자유인(free man)을 의미하듯이, 자유를 갈망하는 태국인들의 염원과 실천은 앞으로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태국을 다녀간 많은 한국인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활력이 넘치고 풍요로운 태국이야말로 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갈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아시아의 위상과 발전 가능성을 감안하면, 아시아는 점점 21세기 지구촌을 주도하는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많은 석학들은 21세기에는 권력의 중심축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절대적 권력자에서 국민으로 이동한다고 전망한 바 있습니다.
절대적 권력자에서 국민으로 권력이 이동한다는 것은 곧 개인의 권리 존중의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꽃피우는 사회를 말합니다.
이제는 축적된 아시아의 역량을 바탕으로 지역 내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의 수준을 높여야 할 때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 지역의 평화와 연대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모든 아시아인의 시대적 과제입니다.
아시아인의 헌법상 권리들의 증진과 보장을 위한 국제연대는 인권 침해라는 과거의 비극을 미래에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틀이 될 것입니다.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는 활동은 궁극적으로 지역의 평화와 아시아의 결속을 이루는 기반입니다.
5.
그래서 아시아에도 인권재판소가 필요하고 설립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아시아의 헌법재판기관들도 아재연합을 통해 헌법과 헌법재판에 관한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왔습니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합의가 있으므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는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사·문화·경제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처음에는 어느 나라도 반대하기 어려운 최소한의 기준으로 한정된 인권 목록을 보장하는 인권재판소를 창설하는 것이 유효한 합의를 도출하는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 인권보장기구의 신속한 설립을 위하여, 처음에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관할과 청구방식을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먼저 심각한 인권침해에 국한한 좁은 범위의 관할권을 가진 아시아 인권보장기구를 발족시킨 다음, 이후 점진적으로 더 포괄적인 아시아 인권헌장을 마련하여 관할권을 넓혀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장 취약한 집단에 대하여 특별한 보호를 제공하고 가장 참혹한 인권 침해 행위부터 방지하여 그러한 피해를 구제하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집단 살상의 금지, 여성에 대한 특별한 보호, 아동에 대한 특별한 보호, 세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집단 살상의 금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제정된 최초의 인권 관련 국제협약의 규율 내용이며, 현재 개별 국가의 협약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반드시 준수해야 해야 하는 대표적인 강행규범입니다.
국민적·인종적·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집단 구성원의 살해, 중대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의 야기, 집단 내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취하는 것, 집단 내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둘째,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문제되어 온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를 아시아 인권재판소에서 규율하고자 합니다. 물리적인 폭력의 금지뿐만 아니라 성적·심리적·경제적 해악을 초래하는 모든 폭력의 금지를 포함합니다. 특히 전쟁이나 내전 및 국지적 무력분쟁의 경우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우선적으로 방지되어야 할 인류 공동의 과제입니다.
셋째, 또 다른 취약한 집단인 아동에 대한 보호입니다.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매매 및 성매매의 금지, 아동 노동의 금지, 아동 군인의 금지 등이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규율이 필요한 시급한 의제입니다.
가입국에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판결 준수 의무가 있고, 금전적 배상명령 등을 통하여 당사자에게 실효적인 구제를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권재판소가 설립되려면 조약의 체결·비준 권한을 가진 각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하여는, 각국 헌법재판기구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수호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태국 헌법재판소가 한국 헌법재판소와 함께 이러한 주요한 역할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리라 확신합니다.
6.
지난 세기에 아시아 각국에서는 전쟁과 심각한 인권침해가 존재하였습니다. 그 주된 원인 중의 하나가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경시에 있었습니다.
아시아 각 나라의 헌법재판이 국내적으로 활성화되고, 동시에 아시아 인권재판소가 활발히 활동한다면, 보편적 인권 보장과 이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공통의 주제 아래 아시아가 결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 지역 내 분쟁을 아시아 인권재판소를 통하여 극복함으로써, 전쟁과 대규모 인권침해의 비극이 아시아 지역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틀을 마련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보편적 인권의 향상,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담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인권침해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위한 기초이자, 미래를 지향하는 지역 내 화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태국이 힘을 합쳐, 아시아에서의 보편적 인권 확인과 보장,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위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