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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역의 기본권 신장과
평화를 위한 국제협력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를 위한 한국 정부의 의무에 관한 한국 헌법재판소 결정과 아시아 인권재판소 구상을 중심으로 -
존경하는 쉬버(Schiewer) 총장님, 존경하는 노이하우스(Neuhaus) 부총장님, 존경하는 예슈테트(Jestaedt) 학장님, 존경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우선 저를 소개해주신 쉬버(Schiewer)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렇게 콜로퀴움 폴리티쿰에서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뤼란트(R?land) 교수님, 드라이어(Dreier)씨 및 모든 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저의 막스플랑크 외국 및 국제형법연구소에서의 15개월간의 연수는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 인상적인 새 대학교 도서관을 제외하고 - 대학교 안팎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프라이부르크의 베헬레(B?chele)가 아직도 변치 않고 흐르는 것처럼, 저의 기억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낸 아름다운 시절로 끊임없이 저를 이끕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보내는 저녁을 통해 이 도시와 이 대학에 대한 저의 친분이 보다 굳건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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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보편적 인권의 보장을 위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 위안부 (혹은 성노예) 피해여성의 인권 침해에 관한 사안으로,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실천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때 특히 반인도적 행위로 인하여 인권을 침해받은 피해자 구제를 위한 아시아 지역 차원의 인권보장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2011. 8. 3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끌려간 위안부 피해여성이 일본 정부에 대해 가지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분쟁을, 한국 정부가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않고 있는 부작위가 위헌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2. 배경이 되는 사실관계를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A. (1) 일본군은 피식민국가 여성들을 군의 성노예로 삼아 군인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목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지역에 군위안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수는 8만에서 2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중 80%는 조선(대한민국 및 북한) 여성들이었고, 그 외 피해자의 국적은 필리핀, 중국, 대만, 네덜란드 등입니다.
(2)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기, 협박, 납치 등의 방법을 통하여 전선으로 끌려가,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한 채 최악의 조건 속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전쟁 중 희생되었고, 일부 귀환자들도 대부분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하였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가족, 사회와 절연된 채 자포자기의 삶을 이어왔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위안부’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고, ‘성노예’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주장 한 바 있습니다.
B. 다음으로 사건의 배경이 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청구권 협정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재산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결과, 최종적으로 1965년에 일본이 일정한 금액을 대한민국에 지불하되,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2) 위 협정 제2조 제3항은 양국 국민이 상대국 및 상대국 국민에 대하여 청구권 주장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습니다. 협정 제3조에서는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분쟁을 우선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결정에 따른다고 규정하였습니다.
(3)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 사건 협정 체결을 위한 한·일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협정 체결 후 개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상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C. (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기자회견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비로소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 1992. 1.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 징집에 직접 관여한 사실에 관한 공문서 6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93. 8. 4. 일본군 및 관헌의 관여와 징집·사역에서의 강제를 인정하고, 문제의 본질이 중대한 인권 침해였음을 승인하며 사죄하는 내용의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3) 하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제는 고령이 된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2014년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내각은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한 재검증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여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이 사건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면서, ‘민간 차원’의 아시아여성발전기금 조성 이외에 법적인 배상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4) 한국, 대만 등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정당한 배상의 대상이 아닌 인도주의적 자선사업의 대상으로 보는 민간기금에 반대하였습니다.
(5) 한국 정부는 1998. 5.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 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이 지급하려고 한 1인당 4,300만원(약 31,000유로)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였습니다.
D. 국제사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가에 의한 여성인권의 중대한 침해이며, 일본의 사죄와 기록공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3. 이제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부작위가 위헌이라는 한국 헌법재판소의 판단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A. 먼저 헌법재판소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협정의 해석에 관한 분쟁과 그 해결절차가 있는지 검토하였습니다.
(1) 한국 정부는 2005. 8. 26. 이 사건 협정은 한·일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다루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사건 협정을 통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미 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 따라서 이 사건 협정으로 소멸한 청구권의 내용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에 해석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은 협정 제3조의 ‘분쟁’에 해당합니다. 분쟁이 발생한 이상, 협정 제3조가 규정한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외교적 경로를 통한 해결 및 중재회부 절차로 나아가지 않은 ‘한국 정부’의 부작위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위헌인지 여부가 문제된 것입니다.
B. 한국 정부의 부작위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긍정하였습니다.
(1)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고의 헌법적 가치이자 국가목표 규범으로서, 국가는 인간존엄성을 실현해야 할 의무와 과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이 제3자에 의하여 인간존엄성을 위협받을 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합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말살된 상태에서 장기간 비극적인 삶을 산 피해자들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시켜야 할 의무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입니다.
(2) 따라서 국가가 협정 제3조에 따라 분쟁해결 절차로 나아갈 의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당한 국민들을 보호할 헌법적 요청에 의한 것이며, 이 사건 협정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작위의무입니다.
(3) 또한 국가의 부작위로 침해되는 기본권도 매우 중대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일본 국가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고 그 감시 아래 일본군의 성노예를 강요당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달리 그 예를 발견할 수 없는 근원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특수한 피해입니다.
국제사회는 이를 ‘군사적 성노예’, ‘인도에 대한 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 매춘제도이자 잔학성과 규모면에서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범죄’로 규정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배상청구권의 실현은, 무자비하게 지속적으로 침해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신체의 자유를 사후적으로 회복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4) 피해자들이 군대 성노예로 내몰렸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70년이 지났고,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지도 20년 남짓 흘렀습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모두 고령이어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경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실현함으로써 역사적 정의를 바로세우고 침해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해지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5) 따라서 한국 정부가 협정에 규정된 분쟁해결 절차로 나아갈 헌법상 작위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부작위는 헌법에 위반하여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C. 이 결론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가 정부에 막연히 ‘외교적 노력을 하라’는 의무를 강제로 부과하는 것은 헌법이 외교행위에 관한 정책판단, 정책수립 및 집행에 관한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하고 있는 권력분립원칙에 반하므로 각하하여야 한다는 재판관 3인의 반대의견이 있었습니다.
D. (1) 한국 외교부는 헌법재판소의 이 사건 결정이 있은 뒤, ‘분쟁해결을 위한 양자 협의’를 갖자는 외교문서를 2차례 보내고, 이와 관련한 국장급 협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일본의 실질적인 답은 여전히 없는 상태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답은 없는 상태입니다.
(2) 2013. 4. 1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 중 성폭력을 방지하여야 한다는 아젠다를 가지고 각 회원국의 노력을 촉구하는 회의를 가졌고, 한국은 공소시효의 폐지, 피해자를 위한 배상과 지원, 여성, 평화와 안보를 위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325호(2000년)의 시행을 위한 국가적인 노력을 촉구하였습니다.
나비 필라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2014. 8. 6. 일본 정부가 전쟁시 성노예 문제에 대한 포괄적이고 공정하고 영속적인 해결책을 회피하고 있다며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2015년 8월 현재 생존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는 47명이며, 모두 고령입니다. 일본의 신속한 피해의 배상과 진솔한 사죄가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4. 이 사건 결정의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법치국가는 인권이 침해된 개인이 사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상의 인권은 문언상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그 규범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국가는 기본적 인권을 침해받은 국민을 보호하고 권리구제를 도모하여야지, 인권침해를 당한 국민의 청구권 행사를 임의로 방기하여도 되는 재량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국가권력에 의한 여성인권의 심각한 침해는 반드시 구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인권법의 준수와 강제의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선례가 될 것입니다.
전시 상황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는 보스니아 내전, 이슬람국가(IS),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도 세계 여러 분쟁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수세기 동안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21세기의 인류공동체와 문명국가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결정은 반인도적 인권침해에 대하여 인류는 끝까지 추적하여 사죄와 반성을 요구할 것이라는 점, 더 이상 국가에 의한 성노예라는 반인도적 인권침해가 어떠한 경우에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반인도적 인권침해를 근절하고 예방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국제사회가 마련함으로써,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인한 되풀이되는 비극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공동 과제라고 할 것입니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제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이 한 인권 침해에 대해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금전적인 배상을 하고 있습니다. 1999년 독일연방헌법재판소 결정(BVerfG, Beschluss v. 13. 5. 1996, 2BvL33/93)에서는,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과 관련해서 국가가 한 국제법상의 포기선언이 개인의 청구권 행사를 막거나 없앨 수는 없다고 이유에서 설시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독일은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연장하거나 배제하여 나치 범죄자들을 지금도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독일은 피해자와 인근 국가를 비롯한 세계의 마음을 열었고, 존경받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유럽연합으로 이어지는 지역 평화협력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5. 그런데 한 국가 내 헌법재판기관의 판단은 효력범위의 한계로 제한된 역할 밖에 수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특히, 반인도적 인권침해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라는 경계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헌법재판과 인권에 대한 국제적 연대의 강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공통적으로 발생한 현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참혹한 인권침해의 반성적 결과로 여러 제도가 도입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 국가 내의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인권보호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 헌법재판입니다. 또한 한 국가의 인권의 침해는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및 국제평화에도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속에 인권보호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입니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로, UN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 차원의 인권보호를 목표로 하는 국제인권협약 시스템 및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 속한 나라들의 인권보장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 온 지역인권보장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
지금 유럽 및 미주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유럽인권재판소, 미주인권재판소, 아프리카 인권재판소 등 지역적 인권보장기구가 운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제력을 가지는 국제규범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위반 시에는 그에 상응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중 유럽의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는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꽃 피울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평화와 통합이 보장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유럽인권재판소의 존재입니다.
유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는 각국의 헌법재판기관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지역 전체의 인권 수준을 향상시키고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인구의 60%가 살고 있는 아시아에만 유일하게 지역 차원의 인권재판소가 없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녹록치 않은 여러 인권상황과 유럽과 달리 제2차 대전 등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미진한 아시아의 비극적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6. 현재 한국 헌법재판소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A.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시아의 헌법재판기관들도 한국의 주도로 2010년 7월에 설립된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을 통해 헌법과 헌법재판에 관한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는 마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B. 먼저 아시아인권재판소의 관할은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점차적으로 확대해나가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1) 아시아 국가들의 다양한 정치·종교·문화·경제·역사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유럽인권재판소 수준의 재판소를 처음부터 마련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여, 나라들 사이의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최소한의 기준으로 출발하여, 차츰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보호 범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2) 궁극적으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역할은 과거의 참혹한 인권 침해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지역의 인권을 신장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급히 방지하여야 하고 침해가 가장 심각한 부분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취약한 집단에 대한 특별한 보호 및 가장 참혹한 인권 침해 행위 금지부터 우선적으로 규율하는 방안을 검토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집단 말살의 금지, 여성에 대한 특별한 보호, 아동에 대한 특별한 보호 세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3) 첫째, 집단 말살의 금지는 현재 개별 국가의 협약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반드시 준수해야 해야 하는 대표적인 강행규범입니다.
국민적·인종적·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집단 구성원의 살해, 집단 내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4) 둘째, 인류 역사에 있어 반복적으로 문제되어 온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를 아시아 인권재판소에서 규율하고자 합니다.
물리적·성적·심리적·경제적 해악을 초래하는 모든 폭력의 금지를 포함합니다. 특히 전쟁이나 내전 및 국지적 무력분쟁의 경우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우선적으로 방지되어야 할 인류 공동의 과제입니다.
(5) 셋째, 또 다른 취약한 집단인 아동에 대한 보호입니다.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매매 및 성매매의 금지, 아동 노동의 금지, 아동 군인의 금지 등에 대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시급한 규율이 필요합니다.
(6) 위의 3가지 인권 목록은 하나의 예시로, 그에 버금가는 심각한 인권침해 유형이 있다면 추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가입국의 자발적 선택으로, 개별 국가들이 이미 가입하고 비준한 국제인권협약의 내용 중 특정한 인권문제에 대해서 자율적으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관할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 역사적 사례는 인권헌장에 들어갈 내용을 확정하는 것에 매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먼저 아시아 인권보장기구를 발족시킨 다음, 점진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아시아 인권헌장을 마련하는 작업을 병행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 인권재판소가 위반 사항에 대하여, 처음부터 강제관할을 가지게 할 것인지, 인권위원회의 중간 단계를 거칠 것인지, 개인 청구를 허용할 것인지 등에 대하여 탄력적으로 협의해 나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초기에는 개인의 직접 청구는 장래의 과제로 두고, 아시아 인권위원회 또는 다른 국제인권기구가 회부하는 사건을 우선 아시아 인권재판소가 심리하는 방안을 채택할 수도 있습니다.
D. 이와 함께 실효성 있는 구제를 위해서는, 가입국에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판결을 반드시 준수하여야 할 의무를 부과하고, 금전적 배상명령 등 당사자에게 실효적인 구제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아 인권재판소는 자신의 판결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당사국의 상황을 감독하고, 의무이행을 위한 간접강제 수단을 확보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아시아 인권재판소 또는 인권위원회는 초기에는 회원국의 인권상황 보고를 취합하여 평가하고, 인권실태를 현지 방문조사하며, 인권침해 관련 자료의 발굴 및 연구, 공무원에 대한 교육 등을 병행하는 작업부터 착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7. 오늘의 발표를 마치기 전에, 끝으로 다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지난 세기에 아시아 각국에서는 전쟁과 심각한 인권침해가 존재하였습니다. 그 주된 원인 중의 하나가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경시에 있었습니다.
인권을 중시하는 합의 위에 선 유럽인권재판소의 활동이 유럽연합의 통합과 더불어 지역의 평화를 가져 온 것처럼,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활동은 보편적 인권 보장이라는 공통의 주제 아래 아시아를 결속시키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 인권재판소는 인권 존중과 생명 중시,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의 틀을 구축하고, 반인도적 인권침해의 억제와 피해자 구제의 이행을 지역적 차원에서 보장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인권 증진은 물론 세계의 평화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이러한 ‘아시아의 꿈’을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긴 시간 경청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궁금한 사항 혹은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