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에 관한 국제적 기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제3차 세계헌법재판회의 두 번째 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세계화 시대의 사회 통합의 과제들’이라는 주제로, 각국의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세계화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세계의 부(富)를 증가시키며, 인권의 보장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 상품, 정보 등의 자유로운 이동은 새로운 사회적 갈등을 창출해내기도 합니다. 또한 빈부격차 등 이미 존재하여 온 갈등을 증폭시켜 균열된 사회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의 양상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통합의 과제들 역시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첫 세션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번 두 번째 소주제인 ‘사회통합에 관한 국제적 기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세션에서는 사회통합을 촉진하고 달성하기 위한 공통되는 국제적인 기준의 구현 가능성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번 회의에 참가하는 국가들에게 보낸 질문지에 대하여 답변을 보내온 55개국의 답변지를 바탕으로 각국의 사례를 수집하였습니다.
질문은, i)사회통합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헌법에 미치는 국제적 영향. ii)사회통합에 관하여 국제적 법원(法源)을 가진 규정, iii)사회 통합 분야에 국제적 기준의 직접적 적용, iv)국제적 기준의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 참고, v)국내 및 국제적 수준에서 적용 가능한 기준들의 상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 사회통합을 위한 국제기준 설정의 필요성 및 기존 국제기준
외국인의 인권이 문제되거나, 정치적?경제적 난민에 대한 사회적 처우, 환경파괴 행위 등과 같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위하여 일정한 국제기준의 설정이 요청됩니다.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 예컨대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 등에 있어서도 국제기준이 중요합니다. 이는 각 국의 정치?경제 상황을 고려한 비교법적 연구를 위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며, 최소한의 인권보장을 위한 버팀목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개별 국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은 인종, 종교, 지역 및 사회?경제적 신분의 차이 등 사회 구성원 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차별적 요소에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경우,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러한 개별 국가의 인권의 문제는 그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평화에 중대한 위협이 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서 소중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보호이며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사회통합을 위한 인권의 보장에 있어 기준이 되는 여러 국제조약들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국제적 기준들과 국내법과의 관계입니다. 이하에서는 각국에서 보내온 답변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각국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2. 국제기준의 국내법적 수용
개별 국가의 헌법은 국제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국제인권법으로 불리는 협약들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인권법의 기준들은 각국의 헌법에서 그 헌법상 지위가 다릅니다. 재판규범으로 원용 가능성 등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국제인권규범이 국내 헌법재판기관에 수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국내 법률이 헌법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심사함에 있어서 헌법재판소가 인권보호에 관한 국제적 기준들을 참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헌법적 문제에 있어 국제적 기준을 암묵적으로 고려하거나 명시적으로 참고하는 나라들은 우즈베키스탄, 부르키나 파소, 알제리를 비롯하여 매우 많습니다. 벨라루스 헌재는 결정을 내릴 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국제법 원칙과 벨라루스가 비준한 국제조약들을 고려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법원은 법률의 합헌성 심사 권한은 없으나, 국내법 조항이 사실상의 헌법(de facto constitution)의 기능을 하는 국제조약(EU법 포함)의 자동집행 조항(self-executing clauses)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심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법이 국제법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유럽인권협약과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법을 ‘norme interposte’(헌법과 법률의 중간단계, 즉 헌법보다 하위에 있으나 이를 위반하면 헌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함)'라고 하여 헌법재판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르메니아와 같이 국제조약 비준 전에 필요적 사전헌법통제를 시행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이는 국제조약에 명시된 의무들이 헌법에 합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핀란드에서는 헌법규정의 해석이 명확하다면 국제적 기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 등과 같은 국제적 기준이 중요한 방식으로 해석에 영향을 줍니다. 포르투갈 헌법재판소에 의하면, 국제기준은 포르트갈 헌법에 보장된 해당 기본권의 내용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헌법적 개념을 실질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코트디부아르 헌법위원회는 사회통합과 관련된 국제기준을 국내적으로 적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이 국제법규를 근거로 주요한 주장을 하는 경우 국제법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여 판단에 참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 근로자의 노동권을 제한한 노동부 예규에 관한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근로기준법 제5조와 함께 사회권 규약 제4조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 법규만을 기준으로 위헌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고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존중해야 할 하나의 규범으로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3. 국내적 기준과 국제적 기준의 상충 문제
위와 같이 세계 여러 나라들은 각 나라의 고유한 기준과 합리적 해석에 따라 국제기준을 각국의 상황에 맞게 국내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국제적 기준이 헌법적 효력을 가지거나 재판의 준거로 직접 인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내 헌법과 인권의 내용을 확인하고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국제적 기준은 헌법재판을 심리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각국 재판소는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내 및 국제적 수준에서 적용 가능한 기준들이 상충되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사회보장카드법 사건에서 사회보장카드법이 아동의 사회보장권과 관련된 유엔아동권리협약과 상충한다고 확인하였습니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국내법이 국제조약과 상충하는 경우 국내 조항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경우, 언론의 자유, 사생활권, 예방적 구금의 수감 정책에 관한 사건에서 유럽인권협약 기준을 다루었습니다. 포르투갈의 경우, 동성결혼에 관한 국제기준이 헌법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심사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육아휴직에 대한 권리를 여군에게만 인정하는 조항의 합헌성 심사에서 ILO 규약을 참조하였습니다.
타지키스탄은 자국이 비준한 국제법규를 준수함으로써 상충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우간다에서는 사형제도에 관한 합헌 판결에서 국제인권법을 언급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에 관한 사건에서 해당조항에 UN 사회권 규약과 ILO 조약이 적절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국제법과 국내법 간의 상충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화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남녀 간 상이한 연금수령 개시 연령에 관한 결정에서 다수의 EU 법규를 분석하였습니다.
헌법과 개별 법률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시대적 배경, 법 감정 등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나라마다 고유한 제도와 기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헌법적 가치와 헌법원칙의 도출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헌법재판기관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보편적인 헌법적 가치가 개별 국가의 구체적 헌법 해석과 상충되는 경우 이를 조화롭게 판결에 담아내는 데 있습니다.
4.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기준의 확인과 지역적 인권기구의 역할
조화로운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논의의 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헌법재판기관들 간의 긴밀한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헌법재판기관들 간의 국제적 연대는 사회통합과 보편적 인권의 보호에 대한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 국가의 상황 및 문화에 매몰되어 객관성과 보편성을 상실할 위험을 감소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미 유럽헌법재판소회의, 불어권 헌법재판소연합, 아랍헌법재판기관연맹 등 9개의 헌법재판기관 간의 연대기구가 존재합니다. 아시아에서도 2010년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렇듯 같은 문화적 토양을 향유하는 지역협의체 또는 동일한 언어권간의 어권별 협의체를 통해 기본권의 보장 및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공유합니다. 정치, 문화적 배경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국제기준 내지 관습의 확립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헌법재판기관들 간의 지역적 연대 외에 인권보장을 위한 보편적 국제기준의 확인과 국내법과의 조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지역인권협약에 바탕을 둔 지역적 인권기구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헌법재판기관들 간의 국제적 연대는 그 자체로는 법률적 강제성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다자간 국제협약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보편적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적 연대의 효과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비해서 다자간 국제조약에 근거한 지역인권보장기구는 인권 보장의 내용에 관해 지역 내 국가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합의를 합니다. 또한 위반행위에 대한 조사·판단·집행 등에 있어서도 장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 국가들의 상호 감시 및 압박 등을 통해 지역인권보장기구의 결정에 대한 이행이 확보될 수 있으므로, 사회통합과 인권 보장의 실효성도 매우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지역인권보장기구로는 유럽인권협약에 근거한 유럽인권재판소, 미주인권협약에 근거한 미주인권재판소, 아프리카 인권헌장에 근거한 아프리카 인권재판소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니제르는 합헌성 블록(bloc de constitutionalit?)에 포함되는 국제적 기준을 암묵적으로 고려하거나 명시적으로 참고하고 있습니다. 베냉에서는 아프리카 인권헌장이 재판소 결정에 자주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유럽의 경우 유럽인권협약 뿐만 아니라 유럽사회헌장,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들이 국제기준으로서 유럽 국가들의 헌법재판에서 직접 적용되거나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럽 내 각국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더 이상 자국의 헌법에 국한된 해석에 한정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5. 아시아 인권재판소 설립 제안
그동안 아시아의 헌법재판기관들도 2010년 7월에 설립된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을 통해 헌법과 헌법재판에 관한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아시아 인권재판소와 같은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은 중대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목도하였고 아직도 그 고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야만적인 인종말살의 비극과 민족 간 갈등으로 인한 인권침해의 고통도 목격하였습니다. 인권을 중시하는 합의 위에 선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활동은 이러한 비극이 아시아지역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지렛대의 역할을 하게 됨은 물론, 아시아지역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아시아 지역 내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회적·문화적 교류도 양적·질적으로 급속하게 늘고 있습니다. 한 국가 내에서는 고용불안정, 빈부격차, 교육기회의 차등, 인종·문화 갈등, 환경 파괴 등 다양한 경제적·사회적 영역에서 계층 사이의 이해관계 상충과 사회적 대립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난민의 증가로 인구 구성이 다양화되고 있어 다양성 존중과 사회결속 및 공공질서의 유지를 동시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가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와 같은 지역 인권보장체제를 도입하여 꾸준히 증대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사회통합의 요청과 과제를 이웃국가들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사한 사회적 배경과 법률문화를 공유합니다. 이를 통하여 사회통합을 위한 국제적 기준을 아시아의 구체적 현실과 상황 속에서 보다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자유와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상시적인 협력과 연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단계에는 아시아 각국이 개인의 인권 보장에 관하여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인권의 범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에 관하여 논의의 폭을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보편성에 반하지 않는 인권 보장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아시아의 전통을 잘 살리면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인권 존중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의 틀을 구축하고, 반인도적 인권침해의 억제와 피해자 구제의 이행을 지역적 차원에서 보장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인권 증진은 물론 지역의 평화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